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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그려지는 삶, 갤러리 감저, 제주 2025


 

#1 이것으로 됐습니다. 출발할 준비는.

 

작은 신발. 아스팔트 위 푹신한 양탄자. 아직 사회화되지 않은 어린아이. 몸집에 비해 큰

책가방. 날개 달린 동물. 거짓말. 정신없는 정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혼자였습니다.

공사 중이었는지 보물찾기였는지.

내내 걸어오던 아스팔트 위 폭신한 다른 길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알록달록한 스펀지 같았던 그 길 위에 내 작은 발이 놓여 있었습니다.

분명 매일 집으로 돌아가는 익숙한 길이었는데.

오늘은 아니었습니다.

작은 발은 알록달록한 스펀지 밑으로, 밑으로 꺼져갑니다.

어둠이 있어 빛이 더 환히 빛나는 길이었습니다.

어둠으로 이어지는 그 길에 빛이 있어 다행히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 길을 따라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엄마가 옆에 없었지만, 그래서 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혼자 멀리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을지 말입니다.

 

 

 

 

 

 

 

#2 땅 위 반 발 떠 있는.

 

현실에 붕 떠서 걸어 다니는 몽유병 환자 같기도 합니다.

어릴 적 실제로 몽유병을 앓기도 했지요.

그림은 저의 그런 마음을 분출하는 구멍 같습니다.

현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현실성을 꿈과 범벅 해버리는 작업을 하곤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 그림이 아닌 것 같고, 허전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꿈인지 진짜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아침과 일상들은 어쩌면 꿈에 가깝지 않나요.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는 기적들을, 신비와 함께.

현실과 꿈의 경계를 바라봅니다.

'불가능과 가능'의 경계에 우리가 심어놓은 보통이라는 단어.

공기, 마음, 시간, 쏟아지는 색채, 무계획을 양심 없이 그리고 싶습니다.

 

 

 

 

 

 

 

 

#3 그림은 언제나 실패와 미완의 역사.

 

살아감의 텅 빈 느낌.

사람들과 있을 때의 나.

그들과 헤어져 혼자되었을 때.

그 뒤의 감정은 언제나 나를 다시 그림 앞으로 불러냅니다.

이게 아니면.

내가 앞으로 더 무얼 할 수 있을지 잘 알 수 없어서.

허무를 공기처럼 폐에 가득히 마셔버리는 삶이 너무 숨이 차서.

다시 그림 앞에 돌아오곤 합니다.

끝끝내 완성해 버리지 못해 누구 하나 만족시킬 수 없는 그림들.

작업실에 오면 맥이 풀립니다.

슬픈 하얀 캔버스와 붓이 있습니다.

 

그림만 빼고 어떤 것이든지 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몸은 작업실에 있지만,

그림에 대한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림이면 될 것 같은 삶.

그림만 아니면 숨 쉴 수 있을 것 같은 삶.

두 가지 모두를 살고 있습니다.

 

 

 

 

 

 

#4 종이돈과 보풀.

시간을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어본다.

종이돈과 보풀이 엉켜있는 시간이.

손으로 만져진다.

돌아가 다시 본다.

푹신한 땅.

알록달록 먼지 같은 천.

작은 발.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

사이사이로 퍼지는 빛.

내가 가닿은 곳은 나이자 내가 아닌 곳.

흰 눈이 소리도 없이 나리면.

아무 소리도 없이 또르륵 빠져버리면.

두 개의 달이 뜨면.

아무래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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