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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주 풍경과 사람 | 여성작가 발굴 지원전, 설문대 여성문화센터, 제주 2022


 

나의 집과 작업실은 서귀포의 시골 동네에 있다. 거의 평생을 이곳을 지키며 살아온 집들과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낯선 사람이 드나들거나 새로지은 건물이 풍경을 바꾸지 않는 조용한 동네다. 이곳에서 눈치채지 못할 만큼 느리게 변하는 풍경은 내 주변의 나무나 풀과 꽃 그리고 천천히 걷는 사람들 뿐이다. 계절을 알려주며 아주 조금씩 변하는, 순서를 달리하여 피어나는 꽃들과 울창한 모습을 자랑하다 입을 떨구는 나무들, 그리고 그만큼 천천히 나이들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들 안에서 하루가 저물고 한 해가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 주지 않는, 제주 시골 동네의 흔한 풍경들이 나의 작업 소재가 된다. -끝도 없이 붉게 피어나는 꽃들, 휘청이는 큰 키의 야자나무, 마을 귀퉁이 마다 거칠게 자라고 있는 삼나무, 빨강 주황 파랑색으로 칠해진 지붕이 낮은 제주의 집과 그 땅 밑을 흐르며 샘솟는 물과 폭포, 길 강아지 고양이들의 나른하고도 서글픈 모습, 제주의 역사를 살았지만 역사에 남지 않을 동네 어르신들의 주름진 얼굴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매끈하지 않고 구불구불한 것, 크지 않고 작은 것, 부드럽지 않고 거친 것에 매료되는 일이 잦은 나에게 너무 예쁜 것은 작업속에 담아내기 어렵다.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나의 그림 속으로 불러들이지 않아도 지금 그 자리에서 오롯이 빛나므로 작업으로 담는 일은 나에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매일 지나는 길을 가다 발에 치이는 작고 울퉁불퉁한 것들을 그림에 담아본다. 그것들을 그리며 가장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순간이 빛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매일 보는 그런 풍경들을 그림에 담을 때 꿈을 그리듯 하다. 그림 속에서 나의 보통의 순간들은 밤하늘과 결합하여 신비함을 보이기도, 이슬 같은 빛이 내려앉아 반짝이기도 하고, 안개 속에 가려져 유영하기도 한다. 사물과 배경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배경을 오색으로 빛나게 하거나 화면 전반에 빛나는 점을 찍어 몽환적으로 빛날 때 그림이 완성된다. 그 반짝임은 내 주변, 이곳 제주에 존재하는 평범한 것들에 대해 느끼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제주 섬에서만 볼 수 있었던 땅이 꺼질 것 같이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들과 숨막히는 열기와 습기의 여름들. 그 거친 섬의 기후 속에서 화려하게 피어 잠시 곁에 머무는 꽃과 사계절을 오롯이 견뎌내는 나무들, 어르신들의 그을린 얼굴. 그것들이 여기 존재하기까지 겪었을 시간의 슬픔과 기쁨이 흐르는 장면은 마치 연극 무대처럼 내 그림 속에서 펼쳐진다. 반짝이고 있지만 서러운 감정들, 평범한 것들이 내게 말해주는 일상의 울림을 그린다.

 

 


 

 

문성은 × 하이재, 하이재 면관, 제주 2022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습니다.

제주에 내려와 살게 된 지 12년이 되었고,

다시 붓을 잡은 건 1년 남짓의 짧은 시간입니다.

다시 시작하게 되어 벅참과 동시에

죽을 때까지 끝내지 못할 숙제를 안게 된 무거운 마음이 듭니다.

 

제 그림을 남에게 보여주는 일은 여전히 쑥스럽고

뭔가 떳떳하지 못한 감정이 앞섭니다.

그림이 여전히 어렵고 저는 그 앞에서 쩔쩔매는 존재이기에

작업에서 후련함을 느끼는 일이 적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주살이가 녹록지 않았지만 지나고 돌아보니 모든 풍경과 만남이

그림의 영감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제 안에 있던 제주가 그림으로 나왔습니다.

제주의 계절마다 예고 없이 찾아와준

바람, 비, 습기, 뙤약볕 같은 영감이 되어준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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