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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대 여성문화센터, 여성작가 발굴 지원전(2022) - 평론

문성은의 제주 풍경 나들이

 

                                                                                                     예술평론가  하 진 희

 

문성은 작가는 군산에서 나고 자랐으며 국민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그녀가 서귀포시 남원읍에 자리
잡은 것은 이제 십여 년이 지났다. 그녀의 나지막한 집과 작업실은 제주의 여느 시골집처럼 구불구불 올레길을
지나면 귤나무들에 둘러싸여 모습을 드러낸다.
집 주변의 키 큰 야자나무와 들쑥날쑥 자라는 삼나무들, 가끔씩 날아와 이웃 동네 소식이라도 전하려는 것처럼
외쳐 대는 까마귀들, 돌담과 멋지게 어우러진 붉은 협죽도꽃과 여름 내내 쉼 없이 피고 지는 노랑 칸나꽃, 지나치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오수를 즐기는 길고양이, 제주의 거친 햇살과 풍파를 간직한
마을 어르신의 주름진 얼굴에 각인된 인내의 세월, 가로등조차 없어 시리도록 컴컴한 한밤중의 영롱한 별빛, 햇살 좋은 날
잘 달궈진 돌담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며 터줏대감 행세를 하는 뱀들, 아예 뽑아버릴 수도 없을 만큼 위세를 떨치는
잡초들, 계절이 바뀌어도 초록을 잃지 않고 굳건히 자라며 온몸으로 해풍을 맞는 소나무들, 서귀포 주변 크고
작은 포구에서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내음, 가을이면 어김없이 거친 비바람을 몰고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태풍,
자고 나면 수북이 쌓인 흰 눈의 무게를 흔적도 없이 녹여내는 따스한 겨울 햇살!
문성은 그녀가 제주에 정착해서 토박이가 아닌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바라보고 느끼고 숨 쉬었던 공간의
이미지들이다.
이번 전시는 제주 시골의 그런 이미지들이 문성은의 감수성과 시각으로 화폭에 담겨 판타지 같은 제주 풍경화로
제주사람들에게 선보인다. 그녀는 “제주 시골에 존재하는 평범한 것들에 대해 느끼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다.”
라고 말한다.
풍경화는 회화의 전통 가운데 극히 전형적인 형식으로 발전해왔다. 오래전에는 자연을 묘사한 풍경이 인물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 배경을 차지하는 부수적인 역할에 만족해야만 했다. 즉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살아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그린 일반적인 풍경화의 개념과 합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즉 풍경이 독립된 미적 사고의
대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풍경화를 회화의 독립된 한 부분으로서 그리기 시작한 화가들 가운데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임 파티니르
(Joachim Patinir, 1485-1524)를 꼽을 수 있다. 그를 ‘뛰어난 풍경화가’라고 묘사한 이는 독일의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알
브레이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였다. 그처럼 근대 풍경화의 발상점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이가 바
로 파티니르이다. 그러나 그의 풍경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담아내기 위해 자연 그 자제의 아름다움을 표
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선택한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그 주제의 내용을 보다 더 극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거
기에 걸맞는 자연풍경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러기 위해서 화가는 빛과 색채의 연출가로서 과장하거나 부
풀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사실 그림이란 실제와 똑같이 닮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풍경화가 한동안 유럽의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표현 방법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그것은 비단 유럽의 풍경화 뿐만이 아니다. 중국 남송 시대의 거장 마원과 하규의 그림에 묘사된 여백과 시적 정서는
현실의 자연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그림이 주가 아니라 시가 그림을
초대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듯 문성은이 그린 제주 풍경화는 실제 제주 시골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성은은 자신의 우울과 그 우울을 떨쳐내기 위해 상상하는 판타지 속 풍경으로 감상자를 초대하고
싶어한다.
아일랜드 시인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가장 진지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예술이 가장 진지한 것은 그것이 삶과 인생의 즐거움과 고뇌를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가 예술가들이 진지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예술가들이
삶과 인생의 고독과 고뇌를 작품 속에 녹여내며 즐기는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인생을 풍자하고
비웃고 때로는 절규하면서도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작품을 들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피카소가 말했듯이 “예술 창작은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숨기 좋은 안전한 피난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타인과 소통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다.” 그래서 미술가는 기꺼이 자신만의 동굴 속에서 삶의 고뇌를 녹여내
새로운 형태로 주물을 떠내는 연금술사가 되고자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찾아낸 진실한 세계를 스스로 즐기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예술가는 창작의 과정에서 고독하게 자신과 마주하며 세상의 진실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기꺼이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가지게 된다. 진실은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해야만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혹독한 시련을 견뎌내야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감수해낸다.
화가는 텅 빈 화폭을 마주하며 선과 형태와 색채로 채워 나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막막함과 고뇌를 쇠를 달구는
금속 장인처럼 수없이 담금질한다. 그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비로소 감상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 완성된다. 그러나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치열한 과정의 흔적은 사라지고
가장 조화롭고 기분 좋은 부분만 남아서 감상자의 시선을 즐겁게 끌어당기는 것이다.
또 우리가 예상치 못한 왜곡과 충격을 주는 표현 방법으로 감상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도 현대미술의 기법이며
아예 기법이라는 것조차 없는 경우도 많다. 예전에는 늘 예술가들이 그 시대의 정신적 리더 역할을 했다면 오늘날에는
과학의 발전과 물질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이는 실정이다. 그러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말했듯이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우주의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그만큼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문성은은 매일같이 마주하는 평범한 주변 풍경을 예술적으로 환기시키고 싶어한다.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 특별하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 주고 싶어한다. 예쁘지 않지만 밉지는 않은 것, 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친숙한 것, 드러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무심한 생명력과 성장,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 불편하지만 소중한 것,
우울하지만 버릴 수 없는 감정들! 그런 것들이 문성은의 시선을 사로잡고 그녀를 창작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녀가 그린 풍경은 언뜻 보면 제주 시골 풍경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녀가 동경하는 세상 속 풍경과
중첩된 듯하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제주의 풍경을 그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상상하는 비현실적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녀가 상상하는 또 다른 세상은 그녀가 떠나온 고향과 육지이거나 아니면 그녀가 마주하는 단조롭고
더딘 제주에서의 일상이 아니라 활기 넘치고 역동적인 판타지 같은 세상일 것이다. 그녀가 “매일같이 보는 풍경들을
그릴 때 마치 꿈을 그리는 듯하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습관적인 우울을
떨쳐내기 위해 화려한 원색의 붓질로 마치 춤추듯 빠른 속도로 캔버스 화면을 부유한다. 그녀가 캔버스에 유화
물감, 오일스틱과 수채화 물감을 번갈아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그녀가 마주하는 현실 풍경과 상상 속 세상의 풍경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물과 기름처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현실과 이상을 상상하고 동경하는 것이다. 그 완충
지대를 표현하기 위해서 오일스틱을 사용한다.
그녀가 제주의 시골 마을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아직은 이방인의 시선으로 제주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녀가 태어난 고향과 육지에 대한 그리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문성은은 스스로 자신이 몹시 우울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녀는 곰돌이 인형을 마음껏 그려보고 싶은 유년의 천진난만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오랫동안의 단절기를 벗어나 이제 다시 그림의 세계로 돌아온 만큼 그녀에게는 앞으로
좀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이 필요하다. “평범한 것들이 말해주는 일상의 울림을 그리고 싶다”라는 그녀의 희망이
좋은 작품으로 결실을 맺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치유의 순간을 선물하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전시를 위해 풍경과 함께 선보이는 몇몇 얼굴 그림은 그녀가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르신들의 얼굴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시골 어르신들의 주름 패인 얼굴에서 고단했던 제주의 역사를 느꼈다고 말한다. 거친 바람이
흩고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기듯이 그 시골 어르신들이 살아온 인내와 절제의 세월이 남긴 노년의 흔적일 수 있다.
시간이 지난 자리에는 늘 슬픔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나이 들면서 생긴 주름은 어찌 보면 무수한 시련을 견뎌온
용기와 인내의 훈장인 셈이다.
문성은이 제주의 풍경을 그렸다고 했지만 그녀의 풍경화가 현실이 아닌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 그림은 실제와 전혀 닮아 보이지 않다. 오히려 문성은의 기억 속에서 튕겨져 나온 오래된 이미지들처럼 보인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아름답지도 않고 정확한 윤곽을 보이지 않은 채 일그러진 얼굴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지 찬찬히 들여다보게
한다. 소통의 통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며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도시인의 우울이 각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겉으로 드러난 얼굴의 외형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본연의 고독과 슬픔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려는 그녀의
시도가 참신해 보인다.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제주에 살면서도 정작 제주 토박이 작가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지 못했던 이방인에서
본 무대로 진출하는 의미 있고 뜻깊은 멋진 나들이의 시작으로 제주 작가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작가로 성장하고 발돋움 하길 기대해본다.